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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갤러리대표 국제신문 아침숲길 칼럼게재
[ 2022-02-16 11:37:03 ]
글쓴이  
관리자      
국제신문

[아침숲길] 와인과 미술 /배미애

  • 배미애 갤러리이배 대표
  •  |   입력 : 2022-02-15 18:42:05
  •  |   본지 22면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이유는 대답하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술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면 사람들은 살아온 날들의 희로애락을 술과 함께 했으니 술은 가히 인생의 동반자라고 말할 것 같다. 동반자까지는 아니어도 나에게도 와인은 삶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고 또 기억하게 하는 고마운 술이다. 지금은 미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와인과 미술의 만남을 반가워하면서 예사롭지 않은 둘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와인이 오랜 기간 퇴적된 땅의 기운을 받은 포도나무에서 만들어지듯이 미술 작품 역시 자연이 가진 물성을 사용하여 이를 숙성시킨 작업의 산물이다. 와인과 미술은 둘 다 인고의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이 제공한 산물에 인간의 성숙된 지혜를 보태어 고차원으로 만든 창작물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훌륭한 와인과 미술작품은 시간이 흐른 뒤에 그 누군가가 그것에 집중해서 즐기고 공감하는 그 순간에 비로소 완성된다.

창작의 과정이 비슷해서인지 예술가들이 와인을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와인에는 감각적인 향과 영혼을 빠져 들게 하는 깊은 맛이 동시에 담겨있어서 예술가들은 와인 한 잔으로 잠시 창작의 고통을 잊으면서 새로운 영감을 얻기도 하며, 때로는 와인 자체에 탐미적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앤디 워홀과 프랜시스 베이컨은 와인에 취해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와인을 사랑했고, 그들 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와인을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기도 했다. 포도넝쿨을 두른 채 넓은 술잔을 들고 있는 술의 신 바쿠스를 그린 카라바조의 ‘바쿠스’를 비롯해 르노아르는 자신이 자주 들러서 빵과 와인을 즐긴 물랭 드 갈레트를 그린 ‘물랭 드 갈레트의 무도회’에 핑크빛 로제 와인을 등장시켰다. 빈센트 반 고흐는 ‘와인을 마시는 사람들’에서 당시 서민들이 일반용 컵에 와인을 따라 마시는 장면을 그렸으며, 식탁에 홀로 앉아 와인을 따라 놓고 생각에 잠긴 뭉크의 ‘자화상’에는 자기 번뇌를 와인으로 달래는 모습이 담겨 있다.

‘와인과 미술의 만남’을 가장 잘 드러낸 예는 와인 레이블에 사용된 미술작품이다. 유대계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이 만든 와인 ‘샤토 무통 로칠드’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처음으로 와인 레이블에 미술작품을 사용했는데, 무명의 젊은 화가 필립 줄리앙은 포도나무와 V(Victory 승리의 첫 글자)자를 레이블로 그렸다. 이를 시작으로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마르크 샤갈, 바실리 칸딘스키,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프란시스 베이컨, 루시안 프로이드 등 세계적 예술가들이 레이블 작가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며 우리나라의 이우환 작가도 2013년 레이블 작업에 참여했다. 샤토 무통 로칠드의 오랜 레이블 역사는 예술과 와인은 유구하지만 이를 감상하고 즐길 인생은 상대적으로 너무 짧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장소 특정적 미술’은 특정 장소에 영감을 받아 그 곳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미술 장르이다. 와인이 재배되는 ‘떼루아’를 대상으로 장소 특정적 미술을 실현한 작품은 와인과 미술이 만나는 또 다른 훌륭한 예이다. ‘키안티 클라시코’로 유명한 카스텔로 디 아마는 2000년부터 와이너리와 현대미술을 접목한 아트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의 작품을 시작으로 다니엘 뷔렌, 아니쉬 카푸어, 루이스 부르주아, 히로시 스기모토, 로니 혼 등 세계적 작가들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해 장소 특정적 작품을 남겼다.

굳이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좋은 사람들과 진솔하고 지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와인을 마실 때 경험하는 지적 즐거움과 행복감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오감을 만족시키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향기와 색깔, 그리고 소리로 과거의 아름다웠던 시간과 장소를 소환하고 여기에 미술의 향기와 감동까지 더한다면 와인은 남은 인생길을 함께 할 도반으로서의 자격을 충분히 갖춘 것 같다. 브루고뉴 와인을 마실 때면 피곤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거닐던 고즈넉한 바젤 강가의 석양 속에 있던 내가 보인다.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게 해준 와인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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