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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대표 국제신문 아침숲길 칼럼게재
[ 2020-05-29 14:05: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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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숲길] 이제 다시 시작이다 /배미애


지난해 홍콩에서 열린 아트바젤에서 제주도의 여성 거상 김만덕을 표현한 작품 ‘김만덕의 심장은 눈물이고 사랑이다’가 주목받았다. 김만덕의 사랑과 온정을 표현한 공중에 매달린 핑크빛 심장과 눈물방울을 보면서 나는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다시 힘차게 뛰는 작가 윤석남의 심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

여성주의 미술을 대표하는 윤석남 작가는 나이 45세에야 비로소 첫 개인전을 열었다. 개인전 이듬 해 미국에서 1년 남짓 회화 공부를 한 것이 미술가로서의 그녀 학력 전부이다. 주부로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던 시기에 잠재되어 있던 재능과 꿈을 과감하게 끄집어 내어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찾고자 또 다른 인생을 시작했다. 여성 최초의 이중섭미술상 수상자가 되었으며 작년에는 여성문화운동을 주도한 공로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

비단 윤 작가뿐 아니라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기에는 늦었다고 생각되는 나이에 새 인생을 시작하여 결실을 본 사람들이 있다. 화가 김환기가 그랬고 소설가 박완서도 그랬다. 그들의 새로운 시작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가슴 벅찬 감동을 경험하지 못하며 ‘나목’을 통해서 궁핍했던 시절의 화가 박수근의 고통과 삶의 연민도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생물학적 성장과 환경 변화에 따라 인생을 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여덟 단계로 나눈 발달심리학자 에릭 에릭슨에 따르면 인간의 정체성은 ‘고정되어 있거나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제 안에서 끝없이 수정될 수 있는 자기에 대한 현실 감각’이다. 그는 노년기에도 ‘삶의 속도는 느려져도 변화와 성장은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생단계별로 주어진 사회적 역할에 따라 마치 수학공식처럼 정해진 틀에 맞춰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각 단계마다 시대 상황이 부여한 성장이나 역할을 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인생 낙오자나 된 것처럼 여겨서 더 이상의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는 트라우마에 빠지기도 한다. 그 결과 지나온 날의 의미를 스스로 평가절하 하기도 하고, 반대로 기대수준이 어느 정도 충족되면 더 이상 변화를 시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한다.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면 어느 하루도 똑같은 날들이 없었다. 무수히 크고 작은 일들이 벌어지는 와중에 심리적·물질적 성취와 상실로 인해 불행과 행복의 감정이 시시때때로 교차하는 변화무쌍한 세월이었다.

늘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인생의 모든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시작하고 끝내면서 무수한 변화를 감당해낸다. 새로운 시작이 절실한 경우도 있다. 심리적·물질적 상실로 인해 절망할 때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않으며, 비록 원하는 결과에 확신은 힘들어도 각자가 지금 처한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인생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나는 모든 희망은 ‘시작’에서 비롯되며 모든 시작은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주어진 사회적 요구나 편견에 아랑곳 않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용기를 내어 도전하는 이를 존경한다.

지난 몇 달간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을 하면서 인생 노년기에 접어든 나는 새로운 시작을 생각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은 잘못됐으며 이제부터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고 누군가가 내게 주문하는 듯하다. 닥쳐올 변화를 예측하기 힘든 세상에서 직면하게 될 과제를 이전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희망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힘듦은 분명하다. 인생단계마다 부여된 역할에도 변화가 있어야 하며 이 변화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세상에서 존재가치를 증명하려면 우리는 상당한 용기를 가지고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같은 공간과 같은 시대지만 낯선 장소와 시간이 되어버린 지금 우리 삶의 터전에서 우리를 왜 다시 출발선에 세우냐는 불평을 하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이야말로 삶의 연장선상에 필연적인 과정임을 인식하고 당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시도하는 것이 가치 있다고 스스로 믿을 때에 우리는 힘을 얻는다. 지금은 새로운 시작을 통해 삶의 맥박을 다시 느낄 수 있는 절묘하고도 중요한 타이밍이다. ‘새로운 시작 모임’이라도 만들어 뜻밖에 불어 닥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나와 우리를 도약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방안을 모색해보면 어떨까 싶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도 제2의 윤석남, 김환기, 박완서,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름 모를 그분들이 되어 힘든 시기에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하며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눌 수 있는 작은 힘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갤러리이배 대표